정치와 사회

金九 김구 신화의 虛構

눈솔-강판순 2022. 11. 28. 23:26

좌파는 이승만을 배격하는만큼 김구를 신격화한다. 그 김구의 정체를 밝혀보자. 더러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김구(본명 김창수)가 천하의 악덕 처세가 김자점의 방계 후손으로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청년시절 살인에 대한 백범일지의 거짓 기록과 경고장 강점 및 주요요인 암살의 혐의, 김일성에 놀아난 수작 등이 김구의 주된 그림자로 여겨진다. 
요컨대  군사정변으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이승만 대통령과 구분짓기 위하여 그를 격하하는 과정 중 대안으로써 과도하게 김구의 위상을 드높였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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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백정 김구(김창수)의 정체
Benhur 2021.5.17 
김구(1876~1949):1893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1894년 동학군의 선봉장 노릇을 하다가 안중근 가에서 한동안 식객노릇을 했다. 그는 김자점(아래참조)의 손자다. 김자점은 효종 때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죄로 능지처참이라는 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구는 얼굴이 곰보이며 어릴 때에는 자기를 곰보라 놀리는 동네 아이들에게 부엌에서 식칼을 가지고 나와 협박을 가할 정도로 과격했다. 한때 승려노릇도 했을 만큼 그는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 후 친일파를 암살하고, 주요공관을 파괴하고, 독립운동을 한다며 지하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이봉창, 윤봉길을 거사에 내보내기도 했다. 사사건건 이승만을 질투했고 1948년 4월 19일에는 북조선으로 넘어가 김일성의 북조선 건국에 협조했다. 이승만이 건국을 한 이후에도 건국사실을 부인하며 사익을 추구하다가 안두희로부터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본명 김창수)가 당시 조선국모를 살해한 일본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한 영웅이라고 표현돼 있다. 그러나 이는 180도 왜곡된 거짓이다. 그는 1896년 9월 고종이 인천으로 긴급 전화를 해서 교수형을 면했다고 허풍을 쳤지만 서울 인천 간 전화가 개통된 시점은 1902년 3월이다. 중요한 핵심들이 거짓인 것이다. 

김구가 살해한 사람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주막에서 나그네 차림으로, 통역하는 아이와 함께 밥을 먹던 상인 ‘쓰치다 조스케’다. 21세의 김창수(김구)는 여관 종업원이 노인보다 젊은이에게 먼저 밥상을 주는 것에 분개해 대우받는 일본인을 살해했다. 돌과 몽둥이로 잔인하게 살해한 후 강에 던지고 일본인이 타고 온 배 안으로 들어가 엄청난 돈을 갈취했다. 주체하지 못 할 만큼의 많은 돈을 배 안에 보관한 것을 보면 쓰치다는 일본군 중위가 아니라 상인이었다. 실제로 일본국은 그가 상인이었다고 밝혔다. 

이런 쓰치다를 일본군 중위라고 생각해서 죽였다는 백범일지는 그야말로 황당한 무협지 소설이다.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김구는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1896년 8월 31일, 9월 5일, 9월 10일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배석하는 합동신문을 받았다. 10월 22일 법부는 국왕에게 김구에 대한 교수형 건의했지만 간신히 사형을 면했다.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898년 3월 19일 탈옥했다.
그런데 김구는 계속 거짓말을 한다. 백범일지에는 만일 1896년 9월 당시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준공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자기는 그 때 처형됐을 것이라는 글이 있다. 고종 왕실에서 인천으로 긴급 전화가 걸려와 사형집행을 멈추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거짓말이다. 한국전자전기통신연구소가 내놓은 ‘우리나라전기통신기술 발달사 연구’ 78쪽에는 최초 전화는 1896년 궁내부에 자석식 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시작됐고, 1902년 3월 한성(서울)과 인천 간에 전화가 개설되고 한성전화소에서 전화업무를 시작함으로써 개통됐다. 그런데 김구는 그보다 6년 전인 1896년 9월에 서울과 인천사이에 전화가 개통돼 있었기에 사형집행이 급제동됐다며 허풍을 쳤다. 
공훈전자사료관으로 들어가 검색창에 ‘토전양량(土田讓亮, 쓰치타 조스케)을 치면 78건이 검색되는데, 그 중에 ’독립운동사자료집‘의 ’토전양량의 격살건 취조문‘의 ’뷰어보기‘를 열면 치하포 사건의 주범 김창수(김구)와 여인숙 주인 이화보의 취조문이 나온다. 백범일지는 이광수가 썼다. 이광수야말로 글재주 하나 가지고 테러왕 김구에 아부하기 위해 온갖 거짓을 지어내 곡학아세한 졸장부다. 아래에 오마이뉴스의 김구 분석이 있다. “박정희가 띄운 김구, 어떻게 진보의 아이콘 됐나.” 그 요지는 이렇다. 
김구의 아들 김신은 5.16당시 공군 중장이었고, 5.16 혁명에 동참했고, 계속해 박정희 곁에서 출세했다. 1962년 공군참모총장직을 예편하고 주 타이완 대사로 8년 있었다. 그 후 교통부 장관을 거쳐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됐다. 전두환이 세운 독립기념관의 초대 이사장을 거쳐 백범김구기념관 관장 및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러한 연유로 박정희는 이순신과 함께 김구를 민족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남산에는 백범광장을 조성하고, 1962년에는 김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대한민국장, 건국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 훈장심사에는 이병도, 신석호가 참여했다” 
그런데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는 이 두 사람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좌익의 여왕벌 격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좌익의 우상 김구를 성역화시켜준 박정희를 매국노라 하고, 김구에게 최고의 훈장을 주라 한 이병도와 신석호를 친일파로 매도한 것은 꼬여도 한참 꼬인 아이러니다. 
김구의 특기는 살인이다. 그는 21살 때 죄 없는 일본인을 돌멩이와 몽둥이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다. 56세이던 1932년에는 어린 이봉창과 윤병길에게 폭탄을 주어 살인을 교사했다. 1947년 7월에는 여운형과 송진우가 암살됐고, 그 암살범이 김구일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여기에 5개월 후인 12월에 한국민주당 당수 장덕수까지 암살당하자 미군정은 미온적이던 태도를 바꿔 김구를 직접 재판정에 세웠다. 이 재판에서 김구는 용케도 무죄로 나왔지만 그가 이끌던 한독당은 치명상을 입었다. 조소앙은 정계를 은퇴했고 김구의 최측근인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겐 교수형이, 조엽과 박정덕에겐 10년형이 언도됐다. 
김구 옆에 있다가는 제 명에 못 간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역사를 몰라 김구 신화를 만들어주었고, 그 처사가 오늘날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좌익들로 하여금 김구 신화를 높이 받들며 똘똘 뭉치게 했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대다수 국민으로 하여금 김구를 민족 최고의 영웅이라고 믿게 했다.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좌익이 설치한 붉은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게 했고, 오늘날 모든 국민 위에 빨갱이들이 군림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역사공부는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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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역사 : 반정공신 김자점의 기똥찬 처세술 (약술)
창의문 문루에 인조반정 공신 47명의 명단이 있지만 53명중 6명인 김자점, 심기원, 이홍립, 이괄, 김경징 등은 없다.
광해군이 아낀 상궁을 매수해 ("가소로운 김생원이 어찌...") 반정모의 보고 묵살 공로로 인조반정 일등공신에 책록, 별벼슬없던 無位無官의 儒生의 인생반전. 정묘호란중 인조를 호위해 강화도로 도주하며 눈도장을 찍음.
심기원 역모사건 때는 "팔과 다리를 벤뒤 머리는 맨끝에 베라", 자기는 죄 폭로 두려워 측근 임경업도 처형.
세손대신 봉림대군(>효종) 세자 결정 때는 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전하 뜻대로 하소서"
강빈(소현세자 비) 역모(조작)사건 조사 때는 "전하 뜻대로 하소서"
병자호란중 총사령관으로 패배 책임자였지만 영의정으로 수직 상승,
권력자를 향한 아첨으로 돈과 권력 챙겨. 효종 즉위후 사치/불의/교만 등으로 탄핵당함. "명나라 연호 쓴다"고 청나라에 고자질했다가 아들 역모에 얽혀 도끼로 토막 처형
"권세에 빌붙어 악생을 저지른 김자점을 도끼로 처형하였다" - 1651년 김자점 처형 사흘뒤 효종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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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김자점: 사육신 사건을 밀고한 김질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암기에 능하였다고 한다. 음서로 조정에 나아갔다가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해 쫓겨난 이후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반정공신으로 녹훈되어 중직을 역임했다. 과거에 급제한 적은 없었으나 실무 관료로 군사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어영청을 육성함으로써 광해군의 난정과 이괄의 난으로 무너진 조선의 군사력을 복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배에 일부 기여했으며 전후에는 인조의 최측근이 되어 권세를 누렸는데 효종에게 숙청당할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에 조선을 고발하고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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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백범일지
...좌파 시민운동가 김상구 씨가 쓴 책 ‘김구 청문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백범일지’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떨어진다고 판단하였다. 저자는 “자서전은 본래 과장될 수밖에 없다. 90% 이상 거짓으로 본다”며 “백범을 우상화하면서 백범일지의 내용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실제로 치하포 사건에 대해 백범일지는 피해자 쓰치다를 일본 육군 중위라고 해 마치 국모살해의 원수를 갚은 것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김구를 심문했던 관헌 문서와 언론에는 쓰치다가 일본 상인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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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북한에 놀아난 죄로 북한에서 영화로 놀림 받는 김구
아래는 당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었던 박갑동 선생의 증언(이철승과의 공저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에서).
1946.6.3일,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 천명했다.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해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했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은 “단독정부는 미국과 이승만의 음모임으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때 김구는 북한의 스케쥴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했다. 홍명희는 김구에게 ‘김구, 김규식 이름으로’ 먼저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하라 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제안을 보냈는데도 김일성이 무시했던 것은 순전히 각본에 의한 연극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9.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의 덕에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믿고 북한을 다녀온 김구는 “양쪽에 다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을 가진 듯 했다.
북한은 당시의 김구의 방북 대목을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에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쇄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평주시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가며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2012. 10.12 지만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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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신화의 허구 (재게) -박찬주 장군의 경고
국가와 국민은 제나라 역사를 공유한다. 해석이나 평가에선 작은 차이들이 있기는 해도 사실의 기록이 어긋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한국은 사실에서 거의 모두 갈려있다. 지구상 유일한 ‘괴이(怪異)한 나라’다. 김구의 ‘기록’과 ’이미지‘는 그런 사례의 본보기다.
김구에 대한 기억은 김구를 거의 신격화한 사람과 반역(反逆)과 살인으로 추억하는 사람으로 갈려있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사상이나 종교의 차이 탓이 아니다. 모두 김구의 발자취를 한국인의 눈으로 보는데도 극으로 갈린다. 이건 사실의 기록에 오류(誤謬)가 있다는 증거다.
김구의 기록은 사실과 다른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적인 사례로 오늘의 사람들이 김구와 마주치는 소위 기념의 집, 경교장도 그 하나다. 포털에서 경교장을 검색하면 『최창학이 친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경교장을 김구에 바쳤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2020년대의 한국인에게는 이게 정설이 되어 있다. 대체 누가 이런 거짓말을 만들어 기록에 올렸을까?
최창학은 광부 출신이다. 금광을 발견해 부자(富者)가 되었다. 친일, 반일, 그 어느 것도 흔적이 없다. 친일도 안 했고 친일할 이유도 없었던 인물이다. 전쟁 말기 일반 가정에서도 총탄 만들라며 놋그릇을 바쳐야 했듯이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내야 했다. 그것뿐이다. 그래 백보를 양보해 친일했다 치고 죄값이라 치자. 그렇더라도 왜 김구한테 바치나? 독립될 새 나라에 바쳐야지 김구가 무슨 자격, 무슨 권리로 친일의 ’죄값‘을 받나?

임정 사람들이 귀국하던 때 ‘임정환영위원회’가 미군정에 사무실을 교섭했더니 “임시정부는 없다. 모두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는 데 동의하고 각서도 썼다”고 했다. 그래도 임정인데 집도 절도 없으니, 해서 임시 거처를 물색했다. 후보지가 최창학의 ’죽첨장(竹添莊)‘이다. 사무실과 주거, 겸용이 가능한 집이었다. 송진우가 교섭했다.
“임정이 공인되면 미군정이 사무실을 줄 것이고 아니면 해산하거나 사무실을 얻고 국무위원들은 각자 집을 마련할 것이니, 3개월, 길어도 반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최창학네 식구들은 사랑채로 나 앉고 본채인 양옥을 임정에 빌려주었다.
1945년 11월 입국한 임정은 모두 경교장에 들었다. 12월 말 정치가 반탁과 찬탁으로 갈리면서 임정이 쪼개지고 이듬해 5월 ’미·소공위‘가 열리면서 임정은 수명을 다했다. 임정 사람들도 정치노선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도 임정 주석이 아니라 ’비상국민회‘ 등 정치단체 대표로 활동했다. 임정이 사실상 해산됐으니 사무실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김구도 제집을 마련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죽첨장을 경교장으로 바꿨다. 주인의 양해도 구하지 아니한 옥호 변경은 강점(强占) 통고였을까?
죽첨장은 최창학이 후대에도 물려주기 위해 돈과 정성을 바쳐 건축한 ’최씨 저택‘이다. 조선 사람이 최초로 지은 양옥이기도 하다. 임정에 빌려줄 때도 죽첨장을 몽땅 내놓은 것이 아니라 주인은 사랑채로 옮겨 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준 것이다. 김구라고 그걸 모르겠는가.
최창학이 집을 비워달라는 뜻을 간접으로 전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고 한다. 최창학은 친구들에게 “세 받는 것도 아닌데…”라고 투덜대며 어찌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김구가 가고 그런데도 그 가족들이 집 비울 생각조차 안 하자 나가라고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김구 유족은 쫓겨났다. 그런 저택을 ’김구 기념관‘이라니….
집 얘기에선 기억해야 할 얘기가 생각난다. 이승만은 미국서 들어와 조선호텔에 들었다. 미국이 들어와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호텔비도 미군정이 부담했다. 그랬지만 미군 신세만 질 수 없다. 돈암장을 얻어 나갔다. 그런데 몇 달 지나 주인이 집 비우기를 원하자 미군정이 미군 대령이 살던, ’마포장’을 주선해 주어 이사했다. 그런데 일본식 집이어서 온돌도 없는 데다 낡아 외풍이 심했다. 낮에도 외투를 입고 있어야 했고 저녁이면 이불 두 채로 몸을 감싸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래서 유지들 40명이 돈을 모아 이화장을 사서 기증했다.
이승만은 빈손으로 왔지만, 김구는 돈이 많았다. 물론 당시는 몰랐고 뒤에 알게 되었지만…. 해방이 되자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김구에게 건국 비용에 보태라면서 중국 돈 1억 위안과 미화 20만 달러를 주었다. 서울에 들어오자 한민당은 모금된 후원금 900만 원도 주었다. 모두 임시정부에 준 것이지만 임정이 곧장 없어져 받은 김구가 김구의 돈으로 썼다.
스칼라피노가 한국에 관해 쓴 저서에서 “황금 줄이 달린 돈방석에 앉아서 자금을 물 쓰듯 했다”는 조선 공산당 다음으로 많은 돈을 김구가 지니고 황금 방석에 앉아 있었다. 경교장 같은 집 수십 채를 사고도 남고 남는 돈을 김구는 지니고 있었다.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 기록도 없고….
어쨌거나 주인 가족이 사랑채에서 불편하게 지내는데 김구 가족이 본채를 점령하고 눌러 앉아버리다니 이런 것이 진짜 강점(强占)이다. 경교장을 ‘김구 기념관’으로 하는 건 남의 집 강점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기념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寄與)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선 독립 말고 대한민국 독립 말이다. 김구가 대한민국 독립을 방해한 치명적인 사례 하나만 되돌아보자.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해 유엔 감독하에 치른 1948년의 5·10 선거 때 김구는 선거 방해의 선봉에 섰다. 소련군, 조선공산당, 김구가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다. 당시의 선거 방해는 투표거부운동 같은 평화적인 것이 아니라 관청을 폭파하고 후보자, 경찰관, 선거종사자, 우파 요인을 죽이는 ‘테러‘였다. 소련이 지휘한 이런 선거 파괴, 우파 말살(抹殺) 전선에 김구도 있었다.
이승만은 선거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청년단체를 선거기간 경찰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했다. 경찰 고위층의 지휘가 아니다. 일선 서장, 지서와 파출소장과 순경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청년단은 학력이 가장 높았던 우파의 엘리트 집단으로 해방정국에서 정치의 주역이었다. 그런 청년들이 경찰 말단의 지휘를 받는 경찰보조를 수락한 것은 놀라운 결단, 이승만이 있고 청년의 절박한 애국심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승만과 청년들은 1만여 경찰로는 선거 테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청년단은 선거운동 마당이 아니라 공산당의 테러를 막는 전선에 있었다. 1만여 경찰 그리고 수십만 명, 청년단원이 밤을 잊고 총과 쇠망치 쇠스랑과 낫을 무기로 해 죽이고 죽임당하며 성취한 테러 저지다.
제주군은 공산당의 섬이었다, 제주 사투리가 육지 말과는 너무 달라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서북청년단도 발을 못 붙였다. 그래서 제주 섬은 4·3폭동이라는 공산당 테러가 투표 저지에 성공한 유일한 남한의 단 한 곳이 되었다. 제주군의 2개 선거구만이 폭동으로 투표가 차단당하는 데 그치고 다른 198개 선거구가 95% 투표율에 이르게 한 투표는 이래서 이뤄졌다. 유엔한위 위원들도 하나같이 경탄(驚歎)한 기적에 가까운 테러 저지였다.
이렇게 세운 나라, 이런 열정, 이런 절박한 애국심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가꾸어 수천 년의 가난에서 탈출하고 수백 년 뒤처진 후진의 땅, 한국을 반세기에 선진국 문턱에까지 밀어 올린 원동력이다.
대한민국 50년은 세계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성취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후대의 기억은 미움이다. 기리기는커녕 기억하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 후대에 미움받고 배척당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 나라가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 내다니 말이 되는가? 이것은 후대의 기억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닌가?

김구 신화는 거짓으로 꾸며진 것, ‘가짜’다. 누가 왜 이런 가짜를 만들어 낸 것인가.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승만을 지우기 위해 김구를 신화로 분칠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 노무현, 문재인이 합창한 대한민국 종말의 노래다. 이 노래를 대한민국의 다수 국민은 노무현한테서 처음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노무현의 노래갸 아니다. 북쪽 김일성의 교시(敎示)다. 남조선 인민을 ‘대한민국 no‘로 세뇌하라고 김일성이 노동당에 명령한 이른바 ‘수령의 교시’다. 조선노동당 그리고 김일성에 충성을 서약한 대한민국의 소위 주사파라는 운동꾼이 김일성의 병정(兵丁)이 되어 ‘대한민국 no’라는 김일성 교시를 수행했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
김구 신화로 출발한 이승만 지우기는 대한민국 no의 출발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가 이승만을 지우고 김구 신화에 침몰해 있는 것은 김일성의 대한민국 지우기 전쟁의 찬란한 승리라고 해야 할 판세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승만 지우기는 제2 제3의 이승만 지우기로 전진했고 지금도 전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나라로 이끌었고 이끌고 있고 공산당에 철퇴를 가했고 가하고 가하려는 이승만의 후예들이 지워지고 혹은 민족의 주적으로 기록되고 적폐로 내몰리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는 대한민국 no로 채색되어 있다. 소설 드라마 연극 영화 노래 다큐멘터리 기타 등등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 no로 채색되어 있다.
김일성의 이런 ‘찬란한 승리’는 간첩, 남파 공작원, 그리고 통일혁명당으로 출발한 남조선 지하당이 만든 것인가? 아니다. 김영삼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의도했건 안 했건 주사파의 공범이거나 하수인이다.
김일성 장학생들은 대한민국 각계각층에 진지(陣地) 구축 단계를 넘어 주류의 자리를 장악해 있다. 3권을 장악한 데 그치지 않는다. 우파 안에도 그들의 장기(長技)인 야체이카, 프락치, ‘그들에게만 쓸모있는 바보’인 동조자 얼치기 건달을 심고 늘리고 있다. 그런 부류가 국힘엔 유난히 많다. 유승민 이준석 등 오렌지족을 이런 부류 중의 하나로 분류한다면 ‘틀리다’고 할 것인가? 이런데도 방관자로 머물러 있는 나는 무엇인가? 오늘을 사는 한국 시민권자라면 이 질문에 대답하고 그 답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이 땅에선 김일성이 김정일이 김정은이 주적으로 점 찍으면 그는 이승만처럼, 백선엽처럼, 민족의 주적으로 채색되고 살아 있는 자는 박근혜처럼, 이명박처럼, 적폐의 멍에를 쓰고 감옥에 유폐된다.
대한민국 주류가 된 남조선의 베트콩은, 베트남의 길 아프칸의 길을 뒤따르는 길로 대한민국을 끌어가고 있다. 아닌가? 이승만이 남겨준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이런 몰골로나마 대한민국이 살아 있기나 할까? 중국 시진핑의 아이들까지 가세해 있는 판인데…. 쿠오바디스!
2021-08-19 <공감할 대목이 하나라도 있다면 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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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증손녀, 태국 1위 재벌가 며느리 됐다…시모도 한국계
중앙일보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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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 백범 김구(1876. 8. 29~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기울어가는 조국을 구하고자 의병활동과 계몽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선임된 이후 내무총장ㆍ국무령ㆍ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무력 투쟁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휘하였으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는 등 27년 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주춧돌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온 평생을 헌신하였다. 선생은 8ㆍ15 광복을 맞아 환국하여 반탁운동, 남북연석회의 참가 등 통일된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서울 종로구 소재)에서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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