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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사회

펌) 젤렌스키와 이승만

by 눈솔-강판순 2025. 3. 2.

젤렌스키 닮은꼴... 6·25 때 美가 축출하려 했던 이승만의 '반전 결론'
[노석조의 외설(外說·ExTalk)]
이승만, 졸속 휴전 반대하며 북진 요구
美 골칫덩이 없애자며 '에버레디 작전' 검토
李, 반공포로 석방등 강수로 한미방위조약 이끌어내
조선일보 노석조 2025.03.02

1950년 10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의 커버를 장식한 이승만 대통령과 2022년 12월 타임지 커버에 오른 젤렌스키 대통령. /타임지

우크라이나의 처지가 풍전등화입니다. 대통령 젤렌스키는 까맣게 다 타고 끝자락만 아슬아슬하게 남은 초 심지 같습니다. 3년간 대국 러시아의 침공에도 사력을 다해 버티고 전세를 역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원치 않는 ‘굴욕 휴전’의 압박을 다름 아닌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영토를 빼앗긴 상태로 휴전된다면, 그 자체로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판정패가 됩니다. 무엇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서 남의 나라의 영토를 전면 침공한 러시아의 불법적 행위를 국제사회가 용인해주는 꼴이 됩니다.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연대와 힘을 뒷배 삼아 용감하게 버틴 젤렌스키는 패장으로 낙인찍히고 다른 성향의 지도자로 대체될 가능성이 큽니다. 3년간 피 흘린 군인과 국민의 희생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미국은 휴전을 이야기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우크라이나 광물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워싱턴 D.C. 백악관을 찾은 젤렌스키는 초라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 등을 상대로 말싸움했습니다.
“당신은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노골적인 표현도 점잖지 못했지만, 흥분해서 상대방 말을 자르며 전임 바이든 행정부는 이렇게 우리한테 잘해줬는데, 너희는 왜 그러느냐는 식으로 시종일관 따진 젤렌스키의 태도도 무례했고 무엇보다 그의 처지에서 전략적이지 못했습니다. 딱했습니다.
약소국의 현실이 어떤지를 소름 돋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금의 우크라이나의 처지를 보며, 그리고 이 나라 지도자 젤렌스키의 모습을 보며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6ㆍ25전쟁 때 우리도 똑같이 원치 않는 조건으로 조기 휴전 압박을 받았고,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젤렌스키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그보다 덜하지는 않은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서둘러 휴전하고 병력을 한반도에서 빼갈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휴전하더라도 북한이 다시 남침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지금 이 기회에 북진해야한다고 미국 측에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북진통일론 및 휴전 반대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존 B. 코치 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와 바튼 번스타인 스탠퍼드대 역사학 박사 등이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해 해제한 미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가지 옵션을 고려했습니다.

첫째는 ‘상시 준비 작전(Operation Ever-ready)’으로, 이승만을 강제 구금하며 그를 축출하려 했습니다.
둘째는, 이승만대통령이 전쟁중후반 무렵부터 주장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미군 철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이 선택한 방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이디어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조약을 끌어내기 위해 2만명의 반공포로 석방 같은 어쩌면 무모할 정도의 승부사적 조치 등을 결단하며 협상력을 키웠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으로서는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의 조약입니다.
엔비디아 같은 세계 초일류 첨단 기술 대기업이 구멍가게 수준으로 매출도 제로(0)이고 미래 가치도 사실상 전무한 신생 기업에 대규모 연구진을 보내 상주 근무하도록 하고 거액의 자금을 아예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수준의 ‘이해 불가’의 계약을 체결한 것과 같은 조약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리튬, 티타늄, 흑연 등 천문학적 가치의 희토류 광물이라도 매장돼 있어, 트럼프가 젤렌스키와 이 광물로 재건 사업을 하자며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나 72년 전인 1953년이나 한국에는 미국이 눈독을 들일만한 규모의 천연자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한미 동맹의 근간이 된 조약을 그 시대에 끌어냈다니 기적적인 딜(deal)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이 만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코리언들은 서로 싸우다가 다 죽을 것”이라고 썼는데, 실제로 이 조약은 1953년 이후 북이 재남침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10월 1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나선 “이제 우리 후손이 앞으로 누대(屢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란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 또한 현실이 됐습니다.

트럼프가 젤렌스키에게, 우크라이나에 너무 모질게 한다는 비판이 거셉니다. 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1952년 트루먼, 1953년 아이젠하워 때도 미국은 약소국 한국의 전쟁터에서 얼른 발을 빼고 싶었습니다. 전쟁비 지출이 막대했고, 미국 내 여론이 부담됐습니다. 오죽했으면 이승만 축출 계획까지 세웠겠습니까?

국제사회의 현실은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고 할 정도로 냉엄하다고 합니다만, 적어도 지금까지 한미 동맹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75년 전 스탈린을 믿고 북한이 남침했던 것과 같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버젓이 일어나고, 미국 주도의 세계 패권에 중국이 노골적으로 도전하고 있으며, 유엔 등 국제기구가 유명무실해지고 각국이 군비를 늘리며 무장하기 바쁜, 각자 도생의 시간이 코앞까지 찾아왔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유지되던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이 뒤바뀌고 있습니다.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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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파원 리포트] 젤렌스키 '뺨' 맞을 때, 대만도 맞았다
조선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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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환 뉴욕총영사*
■ 젤렌스키의 절규가 왜 '이승만 제거 작전'을 떠올리게 하나!!...
슬프다는 말로써는 설명이 어려운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바라보다 1953년 휴전 협상이 생각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과 러시아 간에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협상 테이블에서 빠진 이런 평화 협상은 무효”라고 절규하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많은 지원을 했던 유럽연합도 미국과 러시아 간의 회의 테이블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략을 시작했던 시점부터 세계의 많은 사람들, 많은 국가들이 귀에 못이 박힐정 도로 들었던 것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의 가입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토와 동맹을 맺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반대하는 나토와 우크라이나의 협정 체결은 불가능하다. 냉엄한 국제 정치의 현실이다.
슬프다는 말로써는 설명이 어려운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을 바라보다 1953년 휴전 협상이 생각이 났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과 동맹을 맺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동맹은 비슷한 국력이거나 상호간 필요할 때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3년이나 계속된 한국전쟁에서 한 명의 미군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휴전 협정의 목적이었다.
3년 동안 수만명의 젊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상상할 수도 없는 군사비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였던 대한민국을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만약 한국과 동맹을 체결한다면 미래에도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무기를 지원하고 또 전쟁이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젊은 미국인이 희생되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한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대한민국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사실상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였던 한국군을 한국전쟁 3년 동안 무려 40만 명에 가까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만들어 내었다. '기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물건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수백명의 사병과 수십 명의 장교들을  매일 같이 양성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논산 훈련소, 제 1 훈련소, 제 2 훈련소, 제 3 훈련소 등 수많은 훈련소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에 만들어졌다.
거기에서 배출된 용맹한 대한민국 국군은 목숨을 걸고 공산군과 싸웠다. 그들의 열망은 단 한 가지,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대한민국을 수복하고 북한 공산군이 지배하고 있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 대한민국으로 남북한을 다시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압도적인 미국의 군사력으로 훈련받고 무기를 갖췄지만 그들의 총사령관은 오직 그들의 대통령 이승만뿐이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이 있을 경우 그들은 목숨을 걸고 북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매일 같이 전투를 하고 훈련을 거듭하였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와 강철 같은 반공ㆍ멸공 정신으로 무장된 자유민주주의 최강의 군대였다.
프랑스 르몽드지 종군 기자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군대를 목격하고 프랑스 인들에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신비한 한국 군대에 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기사를 계속 보도하였다.

휴전 협상에 단 1%도 동의하지 않는 이승만에 대해 미국은 극도의 불신은 물론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김일성의 북한 공산당 보다도 더욱 격렬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에버 레디 플랜(이승만 제거 작전)"이었다.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던 민주당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 두 사람은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상반된 정치적 배경을 지녔지만 한 가지 점에서 일치를 이루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이승만 제거였다. 이승만을 암살하거나 이승만을 유배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축출하여 미국에 순종하는 장면 같은 인물로 한국 정부를 새롭게 구성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놀라운 작전이었다. 

이승만은 비록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미국 대통령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단지 그의 주장이 위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는 1905년 조지 워싱턴대, 1907년 하버드대 석사,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당시에 그의 지도교수는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훗날 28대 미국 대통령)이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서 수많은 미국인이 고귀한 피를 흘렸던 나라였다. 눈엣가시 같았던 이승만 대통령을 그들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 종식을 위해서 휴전 협상을 하는 대신에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즉 한미동맹을 체결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1953년 8월에 가조인된 한미 동맹은 1954년 10월에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믿어지지 않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한미 동맹을 통해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당의 침략으로부터 지난 70년간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고 그 기간 동안에 세계가 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루어낸 것이다.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위협에서 구해내고 한미 동맹을 통해서 위대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어 낸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지금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와 같은 침략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왜 대한민국은 번영했을까?"

2025-02-20
김의환 뉴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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