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나라 화폐엔 이씨들만 있는가? 특히 나라에 크게 기여하지 않은 인물들이 왜 있는가?
정말 훌륭하신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이나 단군임금이라면 아무른 이의가 없겠다.
10원: (다보탑)
100원: 이순신
500원: (두루미)
1000원: 퇴계 이황
5000원: 율곡 이이
1만원: 세종대왕, 이도(李祹)
5만원: 신사임당, 이씨집 며느리

율곡 이이에 대한 비판
개인적으로 훌륭한 분이지만 비겁한 선조시절에 옳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평가가 두드러진다.
1. 불교 수용 의혹??: 19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읽는 등 불교에 심취했다는 의혹이 제기. 불교에 심취했던들 문제없고..
2. 정치적 행보와 당쟁: 당쟁을 우려하며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으나, 결국 양측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며 정치적 고립을 겪음.
3. 십만양병설의 실현 가능성: 핵심 정책 중 하나인 '십만양병설'은 막대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란. 결과로 이 정책이 실제 임진왜란 발발을 막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평가도 분분. 무엇보다 선조 당시에 정치력를 발휘할 수 없었던 제약.
4. 정책의 부작용: 세금 부과방식을 바꾸는 신유공안이 시행되었으나, 이는 공물 부담을 가중시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듬. 결과적으로 사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는 비판.
퇴계 이황에 대한 비판
이황은 율곡 이이보다도 기여도가 낮다. 개인은 정치적 혼란(을사사화 등)을 겪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 유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곧 거대한 정치적 세력으로 발전했다.
1. 성리학 교조화 및 근대화 지체: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고 종교화되면서 근대화가 지체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 곧, 성리학을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게 한 데 기여한 이황의 학문적 입장이 비판의 대상이 됨.
2. 현실 정치와의 괴리: 이황이 정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산림으로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했던 점. 결국 그의 제자들이 남인 세력을 형성하며 당쟁의 배경이 되었다는 점도 지적됨.
3. 양명학 배척: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양명학을 이황이 배척하고,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비판. 王守仁의 『전습록』을 비판하면서 양명학을 배척. 참. 양명학) 명의 철학자 왕수인이 창시한 유가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을 강조
4. 성리학 중심의 세계관: 사림인 이황은 성리학을 숭상하면서 국가의 기술 발전을 저해했다는 평가.
5. 재산 관련 비판: 그의 재산이 많았다는 점이 비판. 그가 "부귀를 경계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재산을 많이 모았다는 점을 지적.
6. 노비제를 비판 않고 오히려 많은(360명 이상)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 비판.
참. 노비제) 같은 민족을 대대로 종으로 부리는 이게 무슨 성리학의 거룩한 기본인가?
신사임당 비판
국가에 대한 기여가 미미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지폐에 오름
신씨는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서 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했다 한다. 그러나 그 실력이 역사에 출중하다곤 할 수 없다.
또한 이율곡의 어머니라는 이유 하나로 현모양처라 칭송받는 것도 과하다. 율곡이 16세 되던 해에 신씨가 사망하여 3남 이이는 어머니의 탈상 후 이원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버렸다 하니, 율곡의 학문이 전적으로 신씨 덕분이라 할 수는 없다.
친정살이) 혼인 후 사망하기까지 약 30년의 결혼 생활 중 약 20년을 시댁이 아닌 친정(강릉)에 머물며 생활. 이는 당시 조선 중기까지 존재했던 독특한 혼인 풍습인 '친정살이' 덕분이었으며, 후기 조선의 엄격한 시집살이 문화와는 차이가 있음.
펌) 당시 사임당이 지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현모양처’의 시각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여론도 일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사임당은 정말 현모양처였을까요. 일처다부제가 일반적이었던 조선시대,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자신의 사후 재혼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동계만록’에는 이원수가 공자와 증자의 사례를 들어 이에 반발하자, 사임당은 공자는 부인을 내쫓은 것이 아니며, 증자는 새 장가를 들지 않았다고 반박했다는 기록이 있죠. 주자가 새 장가를 들지 않았던 사실도 강조합니다.
참) 혹 여기다 김구를 거론하는 생각없는 자들은 [김구 신화에 대한 허구]을 찾아보라. (https://psk1236.tistory.com/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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