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와 사회

반복되는 인조의 망령

by 눈솔-강판순 2022. 11. 18.

역사는 돌고 돈다. 조선 시대의 뼈아픈 역사는 선조의 임진왜란, 인조의 병자호란, 고종의 한일합방으로 꼽겠다. 다들 비겁하고 영악하고 열등감이 강한 군주들이었다. 문재앙이 특히 인조를 닮았다.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는 서인들의 세검정 맹세처럼 촛불세력의 탐욕이 문재앙을 옥죄며 지금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권력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인조가 청의 세력에 반하여 큰 산이라며 명을 뒤쫓다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머리를 9번이나 쥐어박던 꼴을 당하고,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 (적어도 방임)하고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이며, 유배시킨 며느리를 죽이려 개ㅅㄲ라 부르던 비겁하고 졸렬하던 그 모습이 지금(2022/2월)의 문재앙과 다를 바 없다. - 2022-02-16 다음블로그 게시글 재게.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권력과 왕비는 영원히 서인이 갖도록 하자"
[181] 인조반정 공신들의 밀약: 숭용산림(崇用山林)과 물실국혼(勿失國婚)
1623년 인조반정 공신들 '우리 재야 인사 등용' '왕비 또한 우리 문중' 권력 독점하자고 밀약
이를 위해 정적은 목숨 뺏고 권력 쟁취 위해서는 목숨도 내거는 조직적 실천
사대부 최고 영예인 성균관 좨주祭酒 24명 가운데 송시열, 송준길 문중 8명
인조~고종 왕비 20명 중 노론 가문 출신 17명, 마지막 처족 민영휘는 1917년 '半島 제일 부호'
조선/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19.09.11 03:00

===============
[선우정 칼럼] 겁먹은 권력자의 말기적 반응.
문 통의 5년은 숙청과 역병의 시대였다. 수많은 원한을 만들고 나의 안락만 구하겠는가.
화내며 도망치지 말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입력 2022.02.16 00:00

문재앙 통령이 야당 후보의 권력 수사 발언에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 불법으로 몰았다”며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 사자와 같은 존재는 이럴 때 “얼마든지 해보라”고 한다. 나약할수록 큰소리로 화낸다. 그는 겁을 먹은 것이다.
훗날 역사가 규정할 문통의 시대는 명확하다. 숙청과 역병의 시대다. 조선 최대 숙청 사건인 갑자사화 때 239명이 유배형 이상의 화를 당했다.(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문 대통령 적폐 수사로 구속 또는 기소 이상의 화를 당한 사람이 그 정도라고 한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적폐 몰이로 직장에서 내쫓겨 삶의 기반을 잃었다. 인격 살인을 당했다. 형벌의 경중은 크게 다르지만 사회에 미친 충격은 비슷할 것이다. 갑자사화를 일으킨 폭군은 자신의 주변에 고인 원한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공허에 미쳐 돌아가다가 폭정의 임계점을 넘어버렸다. 형벌이 과하면 폭군도 불안을 느낀다. 이 시대의 대통령은 오죽할까. 경직된 얼굴 뒤에 숨은 내면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나락으로 내몰고 어떻게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문통 시대의 종막(終幕)은 길고 난삽하다.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생존을 위해 매달렸다. 검찰 수사권을 박탈하고 수사팀을 해체시켰다. 정권에 충성하는 측근을 요직에 앉혔다. 권력 수사 자체를 봉쇄했다. 청와대 울산 선거 개입 수사와 월성 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 수사, 친인척이 관련된 이상직 스캔들 등 정권의 비리 의혹을 상식대로 수사했다면 지지율 40%의 모래성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미래를 이월시켰다. 그러면서 자신만을 위한 면죄부를 약속받으려고 한다.
문통의 서사는 극적이지만 미학이 없다. 비겁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집착했으면서 초연한 척하고, 피를 탐했으면서 착한 척한다. 안락을 갈구하면서 당당한 척하고, 실패했으면서 성공한 척한다. 문통의 5년은 숙청의 시대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아라비아의 향수도 그의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다.” 화내며 도망치지 말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
병자호란 인조정권과 문재앙정권의 공통점
데일리안 입력 2021.01.14 08:31 
문재앙 정권, 병자호란 전후조선조와 너무 유사
문재앙 정권, ‘비과학(非科學)’과 ‘전문가 무시’, ‘반정’은 명목, 사이비정책으로 처참한 결과


===============
위키/ 인조반정)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또한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가혹하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인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정의 하나로 지목하여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귀, 장유, 최명길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실패한 반정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 
위키/ 인조)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정치와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태원 유족들께 고함  (0) 2022.11.22
조갑제의 실체  (2) 2022.11.19
지역 특성 (의견)  (1) 2022.11.18
펌) 억장 무너지는 꼴  (1) 2022.11.15
펌) 꼭 읽어봐야 할 글들 18선  (0) 202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