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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가면 이영춘가옥이 보존되어 있다. 그는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 농장에 와서 농촌의사로 평생 살았다. 구마모토가 보니 돼지나 소는 병들면 수의사가 있지만 소작인은 병들면 의사 하나 없어 안타까움에 농촌 의사를 구하자, 세브란스 의전을 갓 졸업한 청년의사 이영춘이 그에 응했다 한다.
그러니까 일본인 농장주가 보기에도 당시에 소작인들이 돼지나 소보다 못한 삶을 살았는가 보다. 특히 조선조 500년 역사로부터 같은 민족에게 노비란 핍박을 당하며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아온 유전자로 말미암아, 오늘날에 우리는 자유와 인권을 손에 쥐어 주어도 개.돼지보다 못한 노예근성으로 나라를 거덜내려나 보다.
2011년 군산여행을 새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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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의료사 100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근대적 의료 활동의 역사와 쌍천 이영춘.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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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의사 이영춘, 친구들 만류에도 시골행 결심]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1903~1980]은 1935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동] 구마모토 농장[態本農場] 부속 자혜 진료소 소장으로 초빙되어 일생을 농촌 보건사업에 헌신한다. 해방 후에는 자혜 진료소를 모체로 개정 중앙 병원, 개정 농촌 위생 연구소, 개정 간호 전문 대학, 화호 여자 중·고등학교, 개정 뇌병원, 시그레이브 기념 병원 등 수많은 학교와 의료 시설을 설립하여 후배 의사들의 본보기가 됐고, 학계는 물론 소시민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호남 일대 농지 개발의 유망성을 일찍이 간파한 구마모토[態本]는 1903년 10월 광활한 개정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금의 군산시 개정동 장군봉 아래에 대규모 농장[구마모토 농장]을 개설한다. 옥구, 김제, 정읍 등에 경작지 3천 정보와 소작농 3천 가구, 2만여 명의 일꾼을 거느리는 대농장주가 된 구마모토는 소작인 가족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34년 9월 이영춘은 최소한 5년 이상 진료해달라는 당부, 월급 150원[당시 일본인 고등관 의사 대우], 10년이 지나면 농민의 보건 위생을 위한 학술 조사 및 연구할 연구소를 설립해주겠다는 구마모토의 약속을 받고 세브란스 의전에서 배운 인술을 농촌에 심기로 결심한다. 첫 대면에서 '월급은 얼마를 원하느냐?' 고 묻는 구마모토에게 ‘나는 월급을 목적으로 귀하의 요청을 수락하는 것이 아니고, 무료 진료 의사로서 수락한 것이니 귀하는 나를 아사(餓死)시키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대답했다 한다.
1930년 여름 황해도 평산 주재 공의(公醫)와 그곳에서 3년을 개업의로 있는 동안 빈곤과 무지, 질병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하던 이영춘에게 농촌 무료 진료 사업은 잠시 동요되었던 마음을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영춘의 친구들은 농촌 진출을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한다. 그러나 은사 윤일선과 선배 김명선은 농촌 보건 문제는 미개척 분야이니 뜻있는 청년으로 도전해볼 만한 사업이라며 찬성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영춘 역시 평소 농민의 심신(心身)이 건전할 때 희망과 광명의 날이 있을 것이라 믿어 농촌 무료 진료에 몸 담게 되었다.
[농장에 도착하는 날부터 진료 시작]
1935년 4월 1일 새벽.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온 이영춘은 군산에서 약 4㎞ 떨어진 개정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농장 직원이 건네주는 작은 전단지를 받아든다. 작인(作人)들에게 세브란스 의전 이영춘을 초빙하여 진료를 시작한다고 알리는 안내장이었다. 구마모토 초대로 지난해 10월 다녀가서 초행은 아니지만, 드넓은 평야와 논 사이로 흐르는 수로까지 고향 마을[평안남도 용강군]과 흡사해서 정겨움을 느낀다. 더욱 친근한 것은 조선 농민들의 비슷한 생활 모습이었다. 가난까지 비슷했다. 공동 묘지가 있는 마을을 끼고 돌아 구마모토 농장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인데도 지게 위에 이부자리를 깔고 걸터앉은 노인, 소달구지에 이불을 깔고 누운 환자 등 많은 사람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몰려 있었다. 직원은 며칠 전부터 진료권을 발부했다고 귀띔했다. 이영춘이 처음 받은 환자는 지경[현 대야면]에 사는 소작농 최종국이었다. 이영춘은 회고록에서 최씨는 수년 후 작고했으나 그 가문과는 해방 후까지 친교를 지속했고, 후손 중에는 언론인, 은행가도 배출됐다고 술회했다. 1935년 8월에는 농장 사무실을 빌려 쓰던 진료소 건물[39평]이 완공돼 진찰실, 도서실, 약국, 수술실, 실험실 등을 구비하고 진료소 면모를 갖춘다. 경성[서울]에서 내려온 최신은 간호부[간호사]도 합류하고, 이영춘이 거주할 사택[20평]도 신축하여 서울에 있던 가족도 내려와 함께 정착하게 된다.
[결핵, 매독, 기생충은 3대 민족의 독(三大 民族의 毒)]
이영춘의 하루는 통행 금지 해제와 함께 시작했다. 이영춘이 소장으로 부임하던 1935년 진료 환자는 연인원 3만 명이었다. 소작인 가족당 1.5회 진료 받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소작인을 가장하여 진찰권을 빌려 오는 환자도 많았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진료했다. 지역 농장 작인에게도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위해 정읍 화호, 완주 상관, 옥구 지경, 대야 등 4개소 지장에도 최소한의 약품과 의료 기구를 비치하고 조수 채규병과 함께 정기적으로 진료를 나갔다. 대표적인 교통 수단이 인간의 다리였던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은 십리 길도, 백리 길도 예사로 걸어 다녔다. 이영춘에게는 자전거가 한 대 주어졌으나 매일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처지에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환자가 발생하면 험한 시골 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당시 환자들 질병 종류는 신경병, 피부병, 안이질, 외상, 소화 불량, 호흡기 질환 등 비위생 환경, 부주의, 노동 등으로 인한 질환이 많았다, 특히 기생충, 결핵, 매독 환자가 많음에도 농민들이 예사로 알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 이영춘은 훗날 ‘체력을 소모하고, 체질을 저하시키는 결핵과 매독, 유아(幼兒)의 발육과 성장을 억제하는 기생충[회충, 십이지장충, 간 디스토마] 만연은 농촌의 피폐를 뜻하는 그래프로 결핵, 매독, 기생충을 3대 민족의 독(三大 民族의 毒)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아동 위생과 보건에 특별한 관심 둬]
1936년은 최악의 가뭄으로 농촌의 기근이 심화되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따라서 1937년 춘궁기에는 보리죽 먹기도 어렵게 되었다. 가뭄 피해는 개정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발육기의 개정 초등학교 아동들이 점심을 굶는 광경을 애처롭게 지켜보던 이영춘은 학교 창고에 취사장을 만들어 주먹밥 한 개와 소금을 결식아동 340명에게 3개월간 급식하여 우리나라 학교 급식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이영춘은 진료소 부임 초부터 개정 초등학교 교의(校醫)로 매년 신체 검사를 하였다. 1938년 5월에는 전교생[당시 560명] 대상 정밀 검사에서 결핵과 화농성 질환이 많은 사실을 밝혀내고 그 결과를 신경(新京)에서 열린 만선 의학회와 일본 학생 위생 총회때 보고하였다. 1939년에는 농장주 구마모토를 설득하여 한국 최초로 20평 규모의 위생실[양호실]을 지어주고, 1941년에는 대야 초등학교에 양호 교사를 배치하는 등 아동 보건에 힘썼다. 1938년 8월 3일~13일까지 자바[인도네시아 부속 섬]에서 열리는 동양 농촌 위생 회의[국제 연맹 주최]에 참석한다. 일본 정부 대표들과 부산에서 합류하여 20일 만에 자카르타 항에 도착하여 친족과 자국 영사관의 환영을 받으며 모두 하선하고, 이영춘 혼자 선실(船室)에 남아 나라 없는 국민의 비애를 처음으로 통절히 느꼈다고 한다. 1941년 4월에는 세브란스 출신 김성환을 전라북도 정읍 화호 진료소로, 1942년 10월에는 김경식을 지경 진료소로 초빙하였다. 정읍 화호 등 농장 소재 3개 학교에 위생실을 신축하고 양호 교사를 둔 것도 1942년이었다. 1942년 가을 임충정(林忠正) 옥구 군수가 찾아와 ‘지난 봄 실시한 신체 검사에서 갑종(甲種) 합격자가 옥구군 10개면 중 개정면이 가장 높다’며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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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만남, 100년전으로 시간여행
전북중앙 승인 2017.03.09 15:55
살면서 가끔씩은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인들의 발자취를 뒤돌아 보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러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산에는 특히 100여 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만한 곳이 많이 있는데 특별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 [이영춘 가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집은 당시 시대의 생활상을 함축해 놓은 공간이기 때문에 지난 역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인 [이영춘 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전국 최대 규모의 농장 주인이었던 구마모토에 의해서 세워진 집입니다. 1920년대에 건축된 이 집은 한식, 양식, 일식의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건물로 근대 새로운 주거문화가 들어오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의 별장으로 사용된 이 건물은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하게 건축비가 들었다고 할 정도로 고급스럽게 지어져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 농촌 보건 위생의 선구자인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1903~1980)가 사용한 인연으로 [이영춘 가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지주들이 쌀을 일본으로 수탈해 가기 위해서 농장을 경영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고리 대금업으로 이자를 갚지 못하는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확보하면서 농민들은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답니다.
소작인들은 수확량의 약 50%를 지주에게 소작료로 냈는데 비료, 자재비는 소작인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부족한 비용은 다시 농장 주인에게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렇듯 농장은 우리 농민들의 아픔이 서려 있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 농장은 당시 군산은 물론 국내 최대 규모의 농장으로 그 면적이 천백만여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10배가 넘는 크기였습니다. 군산 개정에 본부를 두고 지경, 대야, 화호(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상관(완주군) 등에 지점을 두고 운영을 하였습니다. 소작인은 3,000가구로 가족 수로 보면 2만여 명이 구마모토 농장에 기대어 살았답니다.
농장 운영을 위한 방편으로 했겠지만 그래도 이 농장의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되는 부분은 농장 내에 무료 진료소를 운영했던 부분입니다. 당시 의료 시설을 운영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소작인들에게 무료 진료를 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쌍천 이영춘 박사는 1903년 평남 용강군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모교에서 병리학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 이후 1935년 일본 교토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4월 구마모토 농장 의무실 진료소장으로 부임합니다. 이곳에서 농장 사무실 일부를 개조해서 “자혜 진료소”라는 간판을 걸고 진료를 시작하게 됩니다. 청년 의사인 이영춘 박사의 농촌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개정 진료소에서 10일 진료를 하고 나머지 20일은 지경, 대야, 화호(정읍), 신리(완주) 등을 찾아가 밤 11시~12시까지 진료하는 것이 허다했습니다. 이영춘 박사는 농민들의 생명보호와 건강 유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농촌위생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활동을 하게 됩니다.
1938년에는 당국에 건의해서 개정 보통학교에 최초로 양호실을 두고 양호교사를 배치되도록 하였습니다.
광복이 될 때까지 이영춘 박사가 진료한 환자 수는 20여만 명이나 됩니다. 광복 이후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부속 진료기관으로는 개정 중앙병원, 화호(정읍) 중앙병원, 각 지역에 진료소를 두었습니다.
1951년 군산간호대학의 전신인 개정고등위생기술원 양성소(1952년 개정간호고등기술학교로 개명)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겸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습니다.
지금은 현관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건물 뒤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만 먼저 현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0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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