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금역-> 갑곶돈대주차장 90분, 81Km, \12천원
1갑곶돈대: 외성일부, 전쟁박물관, 갑곶리 탱자나무.
2조양방직 카페: 공장카페, 버릴 것도 전시를 잘하면 훌륭한 장식임을 보여줌. 성공회 강화성당 인근.
3강화 평화전망대: 북한생활상 육안관찰, 노인무료
4교동 대룡시장: 간혹 민통선 임시출입증 필요, 먹을만한 주전부리 천지, 점심
5.1(강화나들길 11코스, 석모도 식물원), 석모도 유정농원에서 바닷가 방파제를 따라...
5석모도 미네랄 온천: 실내탕과 노천탕(15개), 휴게실, 족욕탕, 노천탕은 바닷가와 인접, 460m 화강암 등에서 용출하는 51℃의 고온. 강화군청이 시설공단에 위탁. 최근 온천수 부족. (4시 입장마감), 보문사 인근.
6도솔미술관: 한옥 갤러리, \8천원(음료포함), 한옥마을 일부. 전등사 인근. 음료도 맛없고 볼거리도 그다지...
강화일원 차량 총 90Km, 2시간, 주유비 \15천원
도솔미술관-> 목동역 70분, 51Km, \7500원
* 곶 또는 갑(岬)은 육지 일부분이 하천/바다로 쑥 튀어나온 지형을 가리킨다
* 돈대는 본래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튀여나온) 땅으로, 주로 그 위에 설치된 전망트인 요새를 일컫는다
미네랄 온천 노천탕
석모도 바람길
도솔미술관
기타명소:
전등사: 정족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
강화 삼랑성: 전등사 옆, 단군왕검이 세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성
마니산
적석사 낙조대: 낙조명소,
강화 나들길: 망양돈대-가릉, 화도공영주차장-갯벌센터, 석모도선착장-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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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요약) 강화도(江華島)는 대한민국에서 4번째로 넓은 섬으로, 면적은 302.6 km2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해 있으며, 동쪽으로 경기도 김포시와 도로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39년간 임시수도의 역할을 했다고 추정하나 왕성터등의 흔적은 발견된 적이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와, 단군왕검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과 사적 제136호로 지정된 참성단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등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역사:
화도면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토.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도에서 확인,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도는 한강의 관문이라는 특성상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접전지중 하나였으며, 관미성의 위치가 강화도 부근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강화도를 서해 대도라고 불렀다. 백제가 고구려에 패하고 난 후에 강화도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다.이때 강화도는 혈구군, 혹은 갑비고차 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에 귀속되었을 때는 해구군 혹은 혈구진이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강화도는 혈구도라 불리었다. 신라 후기에는 황해도 남부와 함께 해적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강화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양광도 강화면에 속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벽란도의 통로 역할을 했으며, 목판인쇄소, 소금전매소 등이 설치되었고,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는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곳의 목판인쇄소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이 이뤄지기도 했다. 도읍을 강화도로 천도했을 때의 왕궁터와 고려시대의 성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 천도 이후 식량의 자급력 향상을 위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을 위해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 첨성단을 쌓았다. 개경 환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강화도에서 이어나갔으나, 곧 진도로 남하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강화도가 수행하는 국방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활성화와 함께 한강의 입구로서 진이 설치되고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을 통괄하게 되었다. 강화부사는 경기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우성전,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권율 장군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화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했는데, 연산군, 광해군 등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다. 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과 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다.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로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다.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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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무능한 정권이 자초한 전쟁… 백성들의 붉은 피
[90] 강화도 경징이풀의 비밀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한겨울 47일간 벌어진 병자호란
최고 지도자 인조와 인조반정 공신들… 북방에서 힘 키운 여진족을 오랑캐라 무시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 자기를 멸시한 조선 정복 준비
남한산성 들어간 지도자들이 적 앞에서 춤추며 明 경배
功臣 출신 사령관 김류, 부하들 사지로 내몰아
강화도 수비 대장 김경징, ‘내 아버지(김류) 군수품’이라며 군사들 맨주먹 출정
강화도 갯벌에는 백성들 피처럼 붉은 나문재풀 한가득… ‘경징이풀’이라며 원망
나라는 망했지만 권력층 여전히 明 숭배
박종인 2017.09.07. 박종인의 땅의 歷史
1636년 겨울 47일 동안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한다.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력자들 탓에 고생한 백성들 이야기다. 강화도 갯벌을 뒤덮은 나문재 풀밭이 저리 붉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40년 전 압록강변
임진왜란 와중인 1596년 음력 2월 13일 명나라 사신 여희원과 조선 통역사 하세국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 전해 조선 영토 안에서 인삼을 캐다 벌어진 여진족 27명 살해 사건에 대한 협상단이다. 협상단이 3열로 서 있던 보병 6000여명을 사열할 무렵 사령관 구령에 맞춰 3000여 기마군이 일제히 부동자세로 정렬했다. 협상단이 흠칫했다. 전쟁 초 "왜적을 물리칠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했던 여진족의 청이 떠올랐다. 명과 조선은 "오랑캐 진위를 알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었다.
여진족 추장 노을가적(老乙可赤)이 말했다. "호인(胡人)이 함부로 인삼을 캤으니 우리가 먼저 잘못을 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람이 마음대로 호인을 죽였으니 어찌 분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 원수를 갚고자 한다."
간이 콩알만 해진 협상단 앞에 추장 노을가적이 몸을 낮춘다. "천조(天朝·명나라) 어르신이 이처럼 누추한 곳에 왕림한 것은 전고에 없었던 경사다. 내 어찌 감히 함부로 병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범하겠는가." 협상단 얼굴에 미소가 올라오던 그 순간 분을 삭이던 추장이 소리를 높였다. "풀 한 뿌리를 훔치는 게 죄가 얼마나 크다고 다 죽인단 말인가. 일찍이 군사를 동원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조-명 협상단 얼굴이 흙빛이 됐다.
침묵을 깨고 여진 추장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 천조의 명령이 있으므로 중지한다." 협상단은 오랑캐 추장 하나 잘 구워삶았다고 안도하며 다시 압록강을 도강했다. 임진왜란은 여진의 도움 없이 종료됐다.
그 며칠 전 이 추장은 선물을 들고 찾아온 조선 사신 김희윤에게 "나라 대 나라로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제안은 거절당했다. '희윤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말을 빨리 달려 되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이 오랑캐 추장이 훗날 명을 멸망시키고 대청 제국을 건설한 청 태조, 누르하치다.
김희윤의 두려움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조는 명나라 은혜를 잊지 못했다. 명나라는 그때 군사를 일으켜서 조선을 돕지 않았던가. 전쟁 당시 왕이던 선조는 이순신 '따위' 조선 장수들과 의병 대신 황제국 명나라에 모든 공을 돌렸다.
그때 명나라 인구는 1억명 정도였다. 만주 땅 여진족은 다섯 부족 다 합쳐 100만명 정도였다. 그 무렵 걸출한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족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전쟁 후 왕이 된 광해군은 국가 생존을 위해 이 새로운 세력에 친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명에 대한 배신자라는 핑계로, 그때 야당 세력이던 서인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등극시켰다. 쿠데타 명분이 친명(親明)이었다. 인조 또한 당연히 친명이었다. 친명은 즉 배청(排淸)이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626년 아버지에 이어 왕이 된 홍타이지는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 잔당 모문룡을 조선이 보호하고, 교역 요청을 거듭 거부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강화도까지 도망갔다가 올라온 인조 정권은 배청 정책을 강화했다. 문신(文臣)들은 전쟁 불사를 외쳤고, 무신(武臣)들은 협상을 요구했다. 인조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반정 공신인 문신들 말을 따라야 했다.
*전쟁의 징조들
1636년 2월 후금 권력자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에 입국했다. 가지고 온 서류에 인조 정권이 경악했다. '후금이 황제국임.' '용골대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명나라로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왔다. 2월 26일 사신 일행이 창덕궁을 찾았다. 조선 정부는 창덕궁 금천교 옆에 천막을 쳐놓고 그리 인도했다. 푸대접에 분을 삭이고 있는데, 강풍에 천막이 날아갔다. 중무장한 궁궐 수비대가 천막을 에워싸고 있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서둘러 원대 복귀했다.
전쟁 냄새를 맡은 조선 정부는 3월 1일 국경 지역에 '오랑캐와 절교하니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왕명을 내렸다. 3월 7일 왕명 문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원대 복귀 중이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4월 11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심양에서 열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 사신 두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 사람은 절을 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이 둘에게 '형제국을 무시한 행위'라는 국서를 들려 보냈다. 조선 정부는 국서를 가지고 온 두 사람을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며 귀양을 보내버렸다.
5월 26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6월 17일 또 내린다. "우리는 명의 동쪽 신하국으로, 명이 땅을 잃었다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리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 정권이었다. 그해 10월 청 태종이 선언했다. "11월 25일 전 화친을 결정하라. 아니면 동정(東征)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지만 내가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섬으로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 유신(儒臣)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청 태종이 말하는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고, 끝났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터졌다.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10여개 성은 그대로 놔두고 청군은 순식간에 서울로 진입했다. 청 태종 예언대로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그 속도에 눌려 숭례문 대신 시체들을 운반하는 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을 나열해본다.
*적 앞에서 춤춘 임금과 세자
산성에 들어간 지 13일째. 성 안에 말 먹일 풀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 죽었다. 그 말을 거둬 군사들이 먹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성 밖에 있는 청군에 술과 소를 대접했다. 관료들은 "고위직을 보냈다가 억류되면 창피하니 아랫사람을 보내자"고 했다.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하급 관리가 갔다. 청 태종이 말했다. "굶주린 그대들이 나눠 먹어라. 팔도의 술과 고기는 우리 맘이다." 관료들은 "술을 보내자는 놈 목을 베자"고 주장했다.(인조실록) 심열(沈悅)이라는 유생이 화친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청했다. 조정이 격분해 상소문을 불살라버렸다.
12월 29일 전시 사령관 김류가 산성 북문 밖에서 전투를 벌였다. 적은 싸우려 하지 않고 소와 말을 두고 물러났다. 김류가 비장 유호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다.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였다.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갔다. 매복한 적에게 200명이 몰사했다.
11일 뒤 밤에 한 장교가 성 밖에서 적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김류가 목을 받아 인조에게 올리자 옷감 세 필을 상으로 주었다. 머리에 피가 한 점 없어 기이했다. 잠시 뒤 보니 북문 전투에서 적에게 죽은 사람 목이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연려실기술) 김류가 왕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구했으나 왕은 그대로 두었다.(인조실록)
김류는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다. 또 다른 일등공신인 조선군 총사령관 김자점은 청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할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 또한 전후 무사했다.
설날이 되었다. 인조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향해 예를 올렸다. 망궐례라고 한다. 망궐례 격식을 두고 관료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인 뒤 임금과 세자 부자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산성 동쪽 벌봉에서 대포를 겨누고 지켜보고 있었다.(인조실록) 이튿날 청 태종이 사신에게 말했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이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까?'(연려실기술) 정권을 창출한 공신은 무능력해도 개의치 않았고, 중화기로 무장한 적 앞에서 최고 지도자가 춤을 추었다. 전쟁이 되겠는가.
*백성을 사지로 내몬 야전사령관
김경징은 남한산성 사령관 김류의 아들이다. 그리고 강화도 수비 총책임자였다. 그런데, '…(김포 나루에서) 경징이 배를 모아 그의 가속과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사녀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울부짖다가 적병이 들이닥치니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연려실기술) 쓰러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이럴 수 있느냐…'
김경징은 추위를 이긴다는 핑계로 술을 마셨고, "바다가 꽁꽁 얼었으니 배가 뜰 수가 없다"며 청군의 공격을 무시하였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무기이니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군사들을 맨손으로 출정시켰다. 달아난 김경징 대신 부관 강진흔이 분전했으나 결국 청나라 전군(全軍)이 성으로 들어왔다.
강화도 함락 소식과 함께 남한산성 농성전도 끝났다. 47일 만이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잠실 한강변 삼전도로 나가서 땅에 이마를 찧고 군신의 맹세를 했다. 전쟁 후 강진흔은 패전을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벌이 가중돼 처형됐다. 군졸들은 친척을 잃은 것같이 슬퍼하였다.(병자록)
명아주과 한해살이풀, 나문재를 강화도에서 경징이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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