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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함께

[동백섬] 합창 nwc

by 눈솔-강판순 2022. 11. 27.

온산 앞 바다 동백섬이라 불리던 목도, 온산산단에 갇힌 서글픔을 노래하다

최종경 시, 최영철 곡 [동백섬] 합창 nwc 악보

동백섬(혼4최영철)4.n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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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혼4최영철)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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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출입금지` 국내 최대 동백섬 관광객에 개방되나
매경/ 서대현 기자 2021-02-01
...최근 울산시는 울주군 목도(目島)를 생태탐방지로 개발하는 계획을 밝혔다. 목도에서 자라는 상록수림은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1992년 상록수림 보전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면서 30년 가까이 '미지의 섬'이었던 목도 개방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산업화에 매립될 뻔한 국내 최대 동백섬

과거 동백섬으로 불렸던 울산 목도에서 자생하는 동백나무 <사진 제공=울산시청>

목도는 석유화학공단이 온산국가산단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면적 1만5074㎡, 축구장 약 2배)이다.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 공단 부지에 편입돼 매립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당시 목도는 주민들의 반대로 매립 계획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섬은 모양이 눈처럼 생겼다고 해서 목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섬 앞 육지 마을이 목도마을로 불려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목도에는 동해안에서 가장 북쪽에서 발달한 상록수림이 자생하고 있다. 이 상록수림은 연구 자료로서 학술적 보존 가치가 있어 1938년 5월 조선총독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재지정했다.
목도는 특히 동백나무로 유명했다. 울산대곡박물관 간행물을 보면 목도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뿌리목 둘레 310㎝, 높이 6.6m, 전체 폭은 9.9m에 달한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지도에는 동백도(冬栢島)로 표기되고, 동백섬으로 불렸다. 일제시대에는 동백나무 춘(椿)자를 따서 춘도라고 불렸다. 국내에 동백섬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섬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부산 해운대 동백섬보다 더 유명한 나들이 명소였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공단에 둘러싸여 접근이 힘들어 지면서 기억에서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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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저널 2019-12-12 (발췌)
동백섬 인어와 어부 그리고 동백섬의 생성 전설
아주 오랜 옛날 목섬 앞 마을(목도마을)에는 성품이 어질고 마음씨가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이 청년은 마음씨만 착한 것이 아니라 힘 또한 장사였다. 이 청년은 이곳 어장에서 일꾼으로 생활하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심성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여러 명이 고깃배를 타고 앞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가 그물을 끌어 올려 보니 그물에 인어 아가씨가 걸려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청년이 보기에 그 인어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워 인어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같이 일하던 다른 어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하며 이렇게 큰 횡재를 했는데 다시 놓아준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들 했다. 끝내는 시비가 붙게 되고 난투극이 벌어져 힘센 청년의 힘에 밀린 어부들 모두가 갑판에 나가떨어지자 청년은 재빨리 인어를 안아다 바다에 놓아주었다. 인어는 한참을 헤엄쳐 가다 뒤돌아보며 난투극으로 피투성이가 된 청년의 모습을 감사의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다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청년이 빈 배를 몰고 마을로 돌아오자 이 소문은 곧 전체 마을에 퍼지게 됐고, 어장 주인과 동네 사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어부들이 청년을 죽여 버릴 작정으로 매질을 했다. 힘센 어부들의 혹독한 매질에 청년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청년의 주위로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어촌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혼비백산해 모두가 도망치고 말았다.
한참 뒤 기절했던 청년이 정신을 들었을 때, 망망대해에 혼자 둥실 떠 있는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누웠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같이 커다란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 청년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두고 누워 있었다. 그런 그를 거북이는 용궁으로 인도했다. 용궁에 들어가게 된 청년은 용왕의 옆에 앉아있는 인어 아가씨를 보고 놀라고 반가워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있었던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청년은 용궁에서 며칠 동안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으로 호식하고 영약과 극진한 공주의 간병으로 매 맞은 것이 완쾌됐다. 청년은 이곳 용궁에서 인어공주와 혼례를 치고 난생처음 꿈결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런 어느 날 용왕이 이들 부부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속세의 인간으로 용궁에서는 오래 살 수가 없는 몸이니 때가 되어 과인이 부를 때까지 뭍에 나가 살다 오라”고 말했다. 인어공주가 용왕에게, “저희들이 살아갈 땅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용왕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나가도록 하라”하며, 거북에게 명해 이들 부부를 해변으로 인도하게 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 올라왔다. 이렇게 하여 생긴 섬이 지금의 동백섬이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차동진이 <온산읍지>(온산읍지간행위원회, 2002)에 제공한 내용이다. 1979년에 발간된 <울산유사>에 비슷한 내용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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